두기 (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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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기(杜畿)는 후한 말기에서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효행으로 이름을 알리고 관직에 나아가 하동태수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하동군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을 다스리며 관용과 은혜를 숭상했다. 조조 사후 상서, 사예교위 등을 역임했으며, 과부 징발 문제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두기는 백성에게 근면, 문화, 충성을 가르친 현명한 군주로 묘사되며, 삼국지에서 그의 생애가 긍정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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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창은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문장가이자 건안칠자의 일원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했으며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역병으로 요절하여 조비의 안타까움을 샀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조비와 조식에게 인정받았으며 동생 응거와 아들 응정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두기 (백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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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관 | 시안, 산시 성 |
자 | 백후(伯侯) |
작위 | 풍락정후(豐樂亭侯) |
시호 | 대후(戴侯) |
아버지 | 두충(杜沖) |
자녀 | 두서(杜恕) 두리(杜李) 두관(杜寬) |
생애 | |
출생 | 160년대 초 |
사망 | 224년 |
관직 | |
서평태수(西平太守) | 205년 이전 |
하동태수(河東太守) | 205년 ~ 220년 |
사례교위(司隸校尉) | 220년 ~ 222년 |
상서복야(尙書僕射) | 222년 ~ 224년 |
섬긴 세력 | |
사망 장소 |
2. 행적
두기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계모에게 학대를 받았으나 효행으로 이름을 알렸다. 징자오군 두링현 사람으로 20세에 출사하여 경조윤의 공조(功曹)가 되었고, 정현의 현령(縣令)을 대리했다.[18] 당시 정현에는 미결수가 수백 명 있었는데, 두기는 친히 옥에 가서 모두 판결했다.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한중부승(漢中府丞)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후한 말기에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쳐 형주(荊州,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포함)로 갔다가 건안 연간(196년 ~ 220년)에 돌아왔다.[18] 순욱의 천거로 조조는 두기를 사공사직(司空司直)으로 삼았고,[18] 이후 호강교위(護羌校尉) · 사지절(使持節)로 승진하고 서평태수를 겸했다.[18]
206년[11], 조조가 하북의 원가를 거의 평정하자, 병주에서 고간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는 두기를 하동 태수로 보냈다.[18] 두기는 샛길을 통해 수레 한 대로 하동에 들어갔으며, 위고와 범선에게 평신저두하며 위고에게 도독을 맡기는 동시에 승의 직책도 겸임하게 하고, 공조에도 임명했다. 범선에게도 장교·군리·병사 3천여 명의 지휘를 맡겼다. [18] 두기는 거짓 조언을 하여 위고 등이 병사를 많이 모으지 못하도록 하였고, 병사들의 교대 근무를 조언하며, 위고 등의 수중에 있는 병사를 줄이려 했다.[18] 두기는 여러 현을 아군으로 만들고, 수십 기의 부하를 데리고 관청을 탈출하여 장벽에서 위고 등에게 저항했다. 두기에게 동조하는 관료와 백성은 수십 일 만에 4천 명 정도가 모였다. 위고 등은 고간·장성과 함께 두기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하후돈이 이끄는 대군이 나타나 고간·장성은 패주했고, 범선·위고도 포위되어 참수되었다. 두기는 주모자만을 처벌하고 나머지는 죄를 묻지 않았다.[18]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른 후, 두기는 중앙 관료로 임명되었다. 220년,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자 상서(尙書)가 되었고, 관내후에 봉해졌다.[18] 그해 말,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조위를 건국한 후에는 풍락정후(豊樂亭侯)로 승진하고 사례교위를 대행했다.[18][6]
222년, 조비가 오나라를 침공할 때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승진하여 국정을 관리했다.[6] 2년 후, 조비가 허창으로 행차했을 때에도 낙양에 남아 모든 일을 맡았다.[18]
224년, 조비는 두기에게 동오 공격을 위한 함대 건조를 돕도록 명령했다. 두기는 황제의 누선인 함대의 주력 기함을 담당했다. 도하(陶河)에서 배를 시험하던 중 강풍을 만나 배가 침몰했고, 두기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6] 조비는 두기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가 "충성을 구현했다"고 썼다.[6]
2. 1. 초기 행적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계모에게 학대를 받았으나, 효행으로 이름을 알렸다.[18] 징자오군 두링현 사람으로 20세에 출사하여 경조윤의 공조(功曹)가 되었고, 정현의 현령(縣令)을 대리했다.[18] 당시 정현에는 미결수가 수백 명 있었는데, 두기는 친히 옥에 와서 일일이 모두 판결했다. 비록 전부 타당한 판결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이로써 군 사람들은 두기가 젊은 나이에 큰 뜻을 품었다고 여기고 놀랐다.[18]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한중부승(漢中府丞)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후한 말기에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쳐 형주(荊州,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포함)로 갔다가 건안 연간(196년 ~ 220년)에 돌아왔다.[18] 허(許)에서 경기를 만나 밤늦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대화를 들은[19] 상서령(尙書令) 순욱이 조조에게 두기를 천거했다. 조조는 두기를 사공사직(司空司直)으로 삼았고,[18] 이후 서쪽으로 보내져 호강교위(護羌校尉) · 사지절(使持節)로 승진하고 서평태수를 겸했다.[18]2. 2. 하동 평정
206년[11], 조조가 하북의 원가를 거의 평정하자, 병주에서 고간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순욱에게 "관서의 장군들은 자신의 병력을 믿고 있다. 장성은 병력을 가지고, 형주의 유표와도 연계하고 있다. 또한, 하동군의 위고·범선은 그 세력을 믿고, 아마도 나를 따르지 않고 고간에게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왕읍[12]을 대신하여 하동을 진압할 인물이 없을까"라고 물었다. 이에 순욱이 두기면 충분하다고 즉답하자, 조조는 두기를 하동 태수로 보냈다.[18]두기가 부임하려 하자, 하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다리가 위고 등에 의해 끊어져 발이 묶였다. 조조는 하후돈[13]에게 명하여 그들을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두기는 "하동에는 3만 호의 백성이 있습니다. 대군을 보내면, 범선 등에게 협박당해 부득이 복종했던 자들까지 진짜 적이 되어 버립니다. 위고는 태수 교체에 대해 겉으로만 항의하는 것이니, 토벌하기 전에 그들의 품에 들어가 유리한 계책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샛길을 통해 수레 한 대만으로 하동에 들어갔다.[14]
범선은 두기를 죽이려 했지만, 먼저 협박하려 하여 관청의 관리 수십 명을 참살했다. 그러나 두기가 태연한 태도를 보이자, 위고는 두기를 죽여도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따르면서 속으로는 반항했다. 두기는 위고·범선에게 평신저두하며 위고에게 도독을 맡기는 동시에 승의 직책도 겸임하게 하고, 공조에도 임명했다. 더 나아가 범선에게도 장교·군리·병사 3천여 명의 지휘를 맡겼다. 이 때문에 위고·범선은 두기를 업신여기고, 무경계로 마음대로 행동했다.[18]
위고 등이 수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려 하자, 두기는 "너무 서둘러 일을 크게 벌이면 오히려 해가 됩니다. 조금씩 자금을 들여 병사를 모으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거짓 조언을 했다. 장교들은 자금을 횡령하기 위해 응모자 수를 부풀렸기 때문에, 병사가 얼마 모이지 않았다. 또한 "병사를 긁어모아도, 그들은 자기 집 걱정에 출근하지 않을 테니, 교대로 근무를 짜서 휴가를 주면 좋습니다. 유사시에 다시 징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조언하며, 위고 등의 수중에 있는 병사를 줄이려 했다. 민심을 잃는 것을 싫어한 위고 등은 두기의 말을 따랐다. 그 결과, 두기에게 동조하는 자들은 은밀히 뭉쳤고, 위고 등에 동조하는 자들은 흩어졌다.[18]
각지에서는 장백기가 동원을 공격하거나, 고간이 획택을 침공했다. 더욱이, 상당군의 여러 현이 고관을 살해하고, 홍농군에서는 태수가 붙잡혔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에도 위고 등은 좀처럼 병사를 모으지 못했다. 두기는 여러 현을 아군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때를 틈타 수십 기의 부하를 데리고 관청을 탈출하여, 장벽에서 위고 등에게 저항하기로 했다. 두기에게 동조하는 관료와 백성은 수십 일 만에 4천 명 정도가 모였다. 위고 등은 고간·장성과 함께 두기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여러 현을 약탈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하후돈이 이끄는 대군이 나타나 고간·장성은 패주했다. 범선·위고도 포위되어 참수되었다. 이때, 두기는 주모자만을 처벌하고, 나머지는 죄를 묻지 않고, 각자의 직무에 복귀시켰다.[18]
2. 3. 중앙 관료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른 후, 두기는 중앙 관료로 임명되었다. 220년,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자 두기는 상서(尙書)가 되었고, 관내후에 봉해졌다.[18] 그해 말,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조위를 건국한 후에는 풍락정후(豊樂亭侯)로 승진하고 사례교위를 대행했다.[18][6]당시 기록에 따라 과부들을 징발하는 일이 있었는데, 다른 군에서는 남편이 있는 여자까지 강제로 징발했으나 두기는 과부만을 보냈기 때문에 그 수가 적었다.[20] 후임 조엄이 과부를 많이 보내자 조비가 그 이유를 물었고, 두기는 자신이 이전에 기록된 죽은 자의 아내만을 보냈다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조비와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20]
222년, 조비가 오나라를 침공할 때 두기는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승진하여 국정을 관리했다.[6] 2년 후, 조비가 허창으로 행차했을 때에도 두기는 낙양에 남아 모든 일을 맡았다.[18]
224년, 조비는 두기에게 동오 공격을 위한 함대 건조를 돕도록 명령했다. 두기는 황제의 누선인 함대의 주력 기함을 담당했다. 도하(陶河)에서 배를 시험하던 중 강풍을 만나 배가 침몰했고, 두기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6] 당시 제갈탄도 같이 물에 빠졌는데, 호분(虎賁)이 제갈탄을 구하려 하자 제갈탄은 먼저 두기부터 구하라고 소리쳤으나, 결국 두기를 구하지는 못했다.[21] 조비는 두기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가 "충성을 구현했다"고 썼다.[6]
3. 평가
두기(杜畿)에 대해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는 그의 생애를 이례적으로 성인전(聖人傳)처럼 기술한 ''삼국지''이다. 기록할 사람이 전혀 없을 대화 내용들이 제시되어 있으며, 두기는 백성들에게 근면, 문화, 그리고 죽음으로써 충성을 가르친 완벽하고 현명한 군주로 묘사된다. 이는 아마도 두기의 손자가 황제의 외숙부였다는 사실에 저자들이 민감했을 위서의 오류 중 하나를 ''삼국지''가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7]
참조
[1]
서적
Schaberg
[2]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3]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4]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5]
서적
Loewe
[6]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7]
서적
Qu
[8]
문서
五斗米道の張魯が漢中で独立している。
[9]
문서
『魏略』によると、荊州に数年滞在している間に継母が亡くなり、その後に[[三輔]]への道路が復旧したため、継母の遺体を背負って、途中で盗賊に遭うなど苦労しながら帰郷したという。
[10]
문서
『傅子』によると、ある時、[[侍中]]の耿紀に会いに許昌へ行き、彼の家で一晩中話し合った。耿紀の家は荀彧の家と棟続きで隣接していたため、図らずもその話の内容を聞いた荀彧は、杜畿の才略に惚れ込み、自ら会見したという。
[11]
서적
『三国志』魏志「武帝紀」
[12]
문서
河東太守、当時は朝廷に召し出されていた
[13]
문서
当時の役職は[[河南尹]](『三国志』魏志「諸夏侯曹傳」)
[14]
문서
杜畿は衛固と旧知であったため(『魏略』)、衛固の性格を熟知していた。
[15]
문서
河東の楽詳など、杜畿に採り立てられた儒者は多く、このため三国時代の河東には儒者がとりわけ多かったといわれる(『魏略』)。
[16]
문서
『三国志』魏志「文帝紀」には、[[黄初]]5年([[224年]])秋7月に曹丕は許昌に行幸し、8月には水軍を作り[[寿春]]に行幸したという記事がある。
[17]
문서
[[孫盛]]の『魏氏春秋』。なお20年前、杜畿は司命からの迎えの童子に延命を願い、話を秘匿することを条件にその願いを叶えられたが、うっかりその話をしゃべってしまったため、その日のうちに亡くなったといわれる。
[18]
서적
진수: 《[[삼국지]]》 권16 임소두정창전
[19]
서적
부현(傅玄): 《부자(傅子)》 (진수의 《삼국지》 권16 임소두정창전의 배송지의 주석에서 재인용)
[20]
서적
어환(魚豢): 《위략(魏略)》 (진수의 《삼국지》 권16 임소두정창전의 배송지의 주석에서 재인용)
[21]
서적
손성(孫盛): 《위씨춘추(魏氏春秋》 (진수의 《삼국지》 권28 왕관구제갈등종전의 배송지의 주석에서 재인용)
[22]
문서
이 말은 수명을 관장하는 신(사명)이 두기(아이)의 목숨을 거두겠다는 말인 듯 하다.
[23]
문서
위와 같음 (진수의 《삼국지》 권16 임소두정창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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